위에는 딸기 여러 개, 그리고 아이싱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써주었으면 좋겠어요. 기념일 케이크처럼요. 괜찮을까요? 아, 이름은 아오바 츠무기, 사카사키 나츠메, 이렇게 써주시면 될 것 같아요. 네에, 네. 감사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찾아가면 되는 거죠.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통화가 종료되고, 츠무기는 한 번 더 달력을 본 뒤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케이크는 준비되었고, 역시 그날에는 케이크뿐만 아니라 꽃다발도 풍성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꽃다발은 보라색 꽃이 위주였으면 좋겠다. 나츠메가 자주 뿌리고 다니는 라벤더 향이 좋으니, 라벤더로 꽃다발을 채울까. 츠무기는 주문할 꽃다발을 상상하면서 첫 데이트 날, 저가 나츠메에게 연인으로써 처음 선물해준 꽃다발을 떠올렸다. 나츠메의 머리카락을 닮은 빨간 장미 여러 송이와 안개꽃 무성히. 그리고 그걸 받은 나츠메의 얼굴도 함께 붉어졌고 또 하나의 꽃이 된 것 같았다.
  사랑스럽기도 하지, 츠무기는 가슴 가득 행복함이 차올랐다. 그런 사랑스러운 사람이 이제 자신과 모든 시간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제 인생에 다신 없을 행운, 츠무기는 실실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전화 너머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네, 안녕하세요~. 꽃다발을 하나 주문하려 하는데요. 네, 네에…. 

§§§

  약속이 잡힌 것은 꽤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아무 계획 없이 떠난 바다 여행에서, 밤바다를 걸으며, 두 손을 맞잡고, 우리의 결혼은 언제쯤 하는 것이 좋을지를 얘기하게 된 것이었다. 어쩌다 결혼식 얘기까지 나온 것인지, 그것도 전혀 계획되지 않은 흐름이었다. 그러나 이미 예고된 전개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사실혼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관계이므로 언젠가는 마주쳤을 이야기. 이제서야 이야기하게 된 것은 앞만 보고 달리던 둘에게 옆을 볼 여유가 생겨서였기 때문이었다.
  스위치가 츠무기를 따라 정식으로 사무소에 소속한 뒤, 정신없는 나날들이 연속되었다. 따지고 보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신생 유닛과 신생 사무소, 그룹 내 가장 맏이였던 츠무기와 리더였던 나츠메는 각자 책임감을 스스로 떠안았다. 그때도 이미 앞으로의 시간을 귓가에 속삭이며 또 입술로 말없이 그 뜻을 주고받았던 둘이었지만, 하도 일이 바쁜 나머지 기념일도 어영부영 보내며 앞만 보며 달려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스위치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고 한숨을 돌릴 즈음이었다. 여전히 스케줄은 빽빽이 들어차 있지만 그래도 옆을 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생긴 즈음. 나츠메는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서 운전을 하고 있던 츠무기를 볼 수 있었다. 나츠메는 그가 어쩐지 낯설었다. 아닌데, 분명 어젯밤에도 같은 침대에서 잤었고 아침에도 얼굴을 맞대며 밥을 먹고 방금까지도 같은 방송에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 운전하고 있는 그의 표정은 이때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굳은 표정이었다. 언제 그의 얼굴에 저런 무게감이 생긴 것일까, 나츠메는 자신이 그동안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감각이 생경했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얼굴에 하나둘씩 무거운 짐을 얹었을지도 모른다. 바쁜 스케줄로 인한 스트레스와 고됨, 피로, 자신이 스위치 멤버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등등들이 나츠메도 모르는 사이에 츠무기의 목 위로 탑을 쌓았던 것이다. 지금 츠무기의 시간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자신일 것이라 나츠메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모르고 있던 것이다. 아직도 나츠메 머릿속의 그는 고등학교 시절 대책 없던 복실 안경 선배였는데. 그는 어느새 어른이 되고 이렇게나 어른이 되어갔다.
  참 생경했다. 그럼 어제까지의, 아니 방금까지의 자신과 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얼 보고 지냈으며, 무엇을 보고 사랑하고 뜨겁게 체온을 나눴단 말인가. 다시 한번 운전하는 츠무기를 보고, 차창을 보고. 그리고 나츠메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많이 피곤한가 봐요.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 눈 좀 붙이고 있어요.”
  “….”
  “집에 가면, 얼른 씻고 자야겠네요.”
  “형.”

  운전대를 잡은 손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이 호칭이 뭐라고, 극히 안전운전을 선호하던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나츠메는 알 수 없었다. 저 모습은 예전과 여전한데. 나츠메는 창 밖으로 훅훅 지나가는 가로등의 오렌지색 불빛을 눈에 담으며 툭하고 말을 꺼냈다.

  “나 집에 들어가기 싫은.”
  “네? 무슨 소리예요. 피곤한 것 같은데 어서 들어가서 자야….”

  “그러니까 집에서 자기 싫다.”
  “…. 그, 저, 말이에요. 나츠메 군. 뭣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간에 그렇다고 갑자기 호텔을 잡는 것도…. 아니, 모텔이 더욱, 뭐랄까요. ”
  “떠나고 싶.”


  내일 스케줄도 없잖아. 모레도 없고. 나츠메는 짤막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여행…. 여행 같은 것을 말하는 거죠.”
  “그걸 한 번에 못 알아들어?
  “하지만, 오늘 당장 준비해서 내일 떠나기엔…. 꽤 촉박하지 않나요. 계획도, 숙소도 다 정해야 하고, 그렇게 떠나도 제대로 여행을 즐길 수 있으려나 싶은데요.”
  “내일 떠나자는 거 아.”
  “그럼, 스케줄 비는 날을 생각해두고 미리 갈 곳을 찾아볼까요?”
  “지금 가자는 거.”
  “네!?”


  츠무기는 꽤나 놀랐던 나머지, 기겁한 표정으로 나츠메를 한번 쳐다보곤 차를 대로변에 잠시 주차하였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란 물음이 눈빛에 한가득이다.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암묵적인 질문에, 나츠메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든 가고 싶, 그냥, 굳이 의미 있는 곳이 아니더라….”
  “하지만 나츠메 군, 무슨 생각이라도 있어요? 원래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던가? ”
  “아니, 없는.”
  “그런데 곧바로 떠나자구요? 숙소도 안 정해놓고?”
  “나 지금 너무 답답해서 그. 자는 …. 정 잘 곳이 없으면 밤새면 되.”
  “으으, 그러니까…. ”

  츠무기는 두통이 갑자기 찾아온 듯, 관자놀이를 눌러 대었다. 그러고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나츠메를 설득하려고 말을 꺼내는 참이었다.

  “나츠메 군. 요즘 바빠서 그런 것은 알겠는데요….”
  “바다가 보고 싶.”
  “….”
  “선배.”


  츠무기가 고집부리는 나츠메를 쉽게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특히나 자신과 무얼 하고 싶다는 그런 고집은, 저 또한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에 저렇게 부탁해오면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 계획도 없이 바다로 떠나게 된 것이다. 밤샘 스케줄로 인해 간단한 세면도구 정도는 챙기고 있었지만,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준비되지 않았다.
  나츠메의 제멋대로 그 자체인 즉흥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정말 어떤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무작정 근처의 바다로 떠났고, 눈에 보이는 모텔을 잡고, 원래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다를 걷는 것뿐.

  밤의 바닷바람은 싸늘하다. 츠무기는 제 가디건을 나츠메에게 걸쳐 주었다. 그리고 나츠메는 이 다음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이제 손잡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자연스럽게 체온을 나누며, 저벅저벅 발길에 사뿐히 짓밟히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또 잔잔하게 몰아치는 파도에. 별은 구름에 살짝 가려서 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어디 몰디브였던가, 거기 밤바다는 파도가 반딧불이처럼 반짝반짝 빛난다던데. 나츠메는 언젠가 봤던 인터넷의 블로그 포스트가 떠올랐다. 신혼여행지로 제격이래서 남몰래 북마크로 지정해두기도 했었다. 몰디브에서 함께 모히또를 마시면서 바다를 걷고, 아름다운 해변이 보이는 호텔에서 별빛이 뜨거운 사랑을 시샘하여 밝게 비추는 밤을.
  전혀 말해본 적 없었지만, 나츠메는 그런 것들이 잠깐 부럽기도 했었다. 우리도 그런 평범하면서도 달달한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물론 지금의 연애가 별로라는 것은 아니고, 조금 더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하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우리 결혼은 언제 해? 
  “이미 하고 있던 거 아니였어요!?”
  “아직, 결혼과 비슷하지만. 결혼식은 안 했잖.”
  “그건 그렇지만요. 꼭 결혼식을 해야만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대놓고 결혼식 열겠다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구요.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커밍아웃으로 인터넷을 뒤집어 버릴 수 있다고요? ”
  “진짜 눈치 없.”


  나랑 결혼하기 싫다는 거야? 나츠메는 츠무기를 콕 찌르면서 째려보았다. 됐어, 그럼 평생 나랑 이 정도 사이로만 만족하고 살던가. 누가 진짜로 하자고 그랬던 것도 아니고, 그냥 동의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곤 나츠메는 츠무기를 두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멀찍이 앞서 나갔다. 잠깐만요, 나츠메 군, 그 뜻이 아니잖아요…. 츠무기도 곧이어 나츠메의 발걸음에 맞추어 따라간다.


  “나도 나츠메 군과 단 둘이서만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되고 싶고, 하지만…. ”
  “성대하게 치르자는 거 아니잖. 나도 알아, 일반적인 결혼식은 꿈도 꾸면 안 된다는 .”
  “그래요. 아직 내 말 안 끝났어요. 내가 말하고 싶던 건, 그런 뚜렷한 것이 있어야만 우리의 관계가 의미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 약속이라던가, 사람들이 기념을 할 만한 행사를 굳이 돈을 써서 열려는 것은 괜한 이유가 아니. 의미를 되짚는 것 자체로, 선을 넘어갈 수도 있는 거라.”
  “그렇다고 해서 지금 아무런 준비도, 준비할 시간도 없는 이때, 우리의 중요한 의미가 될 결혼식을 서투르게 하고 넘어가고 싶진 않아요. 적어도, 우리가 나중에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은 하고 싶다구요.”
  “….”


  나중에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나츠메는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우리의 결혼식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상향을 품고 있는 걸까. 츠무기의 생각을 제 기준으로 어렴풋이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더욱 어려웠다. 예전에는 그걸 전혀 몰라서 싸우기만 했었는데, 싸운 것이 한두 번도 아닌 지금은 경험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괜찮으려니~ 하는 마이페이스 스타일처럼 보이는데, 연애를 하고 동거를 하고서부터는 생각보다 그가 이 관계에 대해서 겁을 내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나는 더 조촐하게 하고 싶.”
  “확실히, 크게 치르는 건 안될 말이지요.”
  “우리 둘만 있더라도, 그냥 기념할 수 있는 정도여도 나는 괜찮을 것 같은.”
  “정말요? 하객이 없어도?”
  “눈치 좀 채. 나는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고 있잖아.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아니, 그건 알고 있었는데요. 그럼 평소하고 결혼식하고 크게 다르지 않지 않아요?”
  “다르게 하면 되.”

  뭔 걱정이 그렇게 많아. 나츠메는 팔짱을 끼면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커플링이 결혼반지가 되고, 뭐 그 정도면 되는 거 아닌가. 솔직하지 못한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예쁜 웨딩 화보를 찍는 거, 나름 내 소원이었는데요.”
  “그건 왜?
  “예전에 사진관 앞을 지나가다가, 그 속의 부부가 정말 행복해 보여서요.”
  “나는 안 찍어도 상관없지….”
  “찍어요, 나중에. 나츠메 군은 분명 귀엽게 나올거예요.”
  “그러니까 더 안 찍고 싶어졌.”
  “우우…. 그럼 뭘 바라는 거예요. 지금 당장 신혼여행 가겠다고 사무실에 말하면 발칵 뒤집어질걸요. 아직 스케줄이 밀려 있는데 어딜 가냐고….”
  “그러게. 뭘 하면 좋을까?

  팔짱을 끼던 것도 잠시, 츠무기는 나츠메의 뒤에서 한 품에 쏙 들어오는 몸을 꼬옥 안아줬다. 그러니까 조금 나중에 해요, 시간 많을 때. 착하죠, 나츠메 군….

  “그렇게 말하니까 더 고집부리고 싶은.”
  “그럴 줄 알았어요. 나츠메 군 맘대로 해요.”
  “우리 스케줄 또 비는 때가 언제.”
  “으음…. 한달 후쯤일걸요. 그래봤자 주말에 쉬는 거지만.”
  “그럼 그때 각자 결혼식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거 한두개 들고 와서 조촐하게 흉내라도 내보. 신혼여행이니 뭐니 그런 건, 나중에 하던.”


  분위기를 타고 흘러간, 즉흥적이기 그지없는 결혼식 계획은 그렇게 세워졌다. 결혼식이라고 하기엔 꼭 어린애 장난 같지만, 제대로 한다면 아마 나중이겠지. 무거운 것은 막연히 미래로 미뤄두고, 두 사람은 그 순간의 흥을 즐겼다. 우리 이제 들어갈까요, 추워지는데. 춥긴 뭐가 추워, 이렇게 꼭 안고 있으면서. 또 다른 사람들이 보면 과한 당도에 신경질을 돋울만한 말을 하곤 그날 하루의 마무리는 어느 구석의 모텔의 허름하기 짝이 없는 침대에서, 귓가에 정돈되지 않은 사랑을 속삭이며 끝냈다.

§§§

  있지, 선배는 어떤 커플링이 좋아? 선배가 어떤 보석을 원하든, 그건 문제 되지 않아. 아 물론, 아주 비싼 다이아몬드라면 조금 힘들겠지만. 나츠메는 문득, 처음 커플링을 맞출 때를 떠올렸다. 언제였더라, 아마 저가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사귀는 거니까 정말 당연하게도 커플링부터 맞출 생각을 했고, 형편이 조금 빡빡했던 그였기에 나츠메가 먼저 제안했었다. 답이 어떻게 돌아왔더라, 뭐랬더라, 그런 거 부담스러울 테니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왕이면 가장 저렴한 걸로 해달라고. 어쩐지 분했던 나츠메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백화점으로 가서 커플링치곤 꽤 과분한 돈을 써서 츠무기에게 들이밀었다. 츠무기는 기겁해서 자기가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났던 나츠메는 이걸 끼지 않으면 태어난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으르렁대었다. 그렇게 약지에 하나, 그리고 나중에 츠무기가 입지가 생기고 돈을 꽤 벌게 되면서 커플링으로 나츠메에게 미안했던지 레스토랑에서 수줍게 내민 반지 하나, 츠무기와 나츠메의 약지에는 반지가 각각 두 개씩 있었다. 생각해보니 커플링 맞추는 것도 참 일이 많았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츠메는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게 되었다. 역시 결혼반지 같은 건 같이 맞추러 왔어야 했는데. 또 이러다가 커플링 맞출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결혼반지는 무조건 나츠메의 뜻을 따르겠다는 츠무기였지만, 나츠메는 그것도 불만이었다. 좀 함께 맞추면 덧나나, 오늘은 일이 바빠서 같이 못 오는 거였다만 아무튼 나츠메는 이것저것이 전부 신경 쓰였다. 결혼반지 맞추자고 스케줄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둘이 스케줄을 맞추자니 한쪽이 스케줄이 없으면 한쪽이 있는 상황이라 원래 약속했던 조촐한 결혼식 날짜에 맞출 수 없었다.
  결국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저 혼자 반지를 살펴보고 있다. 적어도 커플링보다는 무게 있는 것이어야 할 테고, 보석도 홧김에 정할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단, 그 의미가 선배가 단번에 알아차릴 만큼 어렵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눈치 없는 건 예나 저나 똑같아서, 기껏 여러가지 의미를 넣어도 제 뜻의 반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결혼 반지하면 역시 다이아몬드 반지겠지만, 그건 또 뭐랄까,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싶은데.

  “탄생석 같은 것이 가장 무난하려.”
  “네, 끼시는 분 생일은 몇 월이신가요?”

  나츠메가 1시간째 고민하는 것을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듯, 점원이 말을 걸어왔다. 금세 탄생석이 박혀있는 여러 디자인의 반지들을 주르륵 내놓았다.

  “…한 명은 자수정, 한 명은 페리도트에.”

  어쩜, 나열해보니 탄생석과 은근히 색이 맞는 듯하다. 제 머리카락 색이 살짝 연상되는 붉은 기가 섞인 자수정은 그렇다 치고, 페리도트는 꼭 그의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듯한 보석이었는데. 햇빛을 받으면 밝은 황갈색처럼 보이고 또 달빛 아래서 저를 눈에 담을 때는 녹갈색처럼 보이는 그의 침잠한 눈동자. 나츠메는 더 이상의 고민을 하지 않았다.

  “보석은 이걸로 갈게. 디자인….”

  또 뭘 준비해 가야 할까, 역시 신혼 첫날밤에는 와인이 필요하겠지. 얼마나 마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츠메는 제 볼이 붉어진 것도 모른 채 딴 생각에 열중했다. 점원이 손님? 어디 아프세요? 하면서 반지들을 내밀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반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 디자인이 조금 더 끼고 다니기에는 무난한 것 같은데요, 네. 저것도 괜찮긴 하지만….

§§§

  바쁘면 시간감각도 잊는다더라. 매번 날짜를 의식하지 않아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언제 잤는지도 모르게 아침 눈을 뜨고 보면 빨간 하트의 날짜는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왔다. 츠무기가 빨간 색연필로 신중하게 그려둔 하트는 고작 그것 때문에 15분 동안 달력 앞에 있었냐고 하는 나츠메의 한마디를 듣긴 했지만, 바쁜 와중에도 두 사람의 아기자기한 결혼 준비를 잊지 않도록 기억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처음 약속을 잡은 것은 한 달 전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당일이 되었다. 나츠메는 조금 불안한 듯, 또는 설레는 듯, 조마조마하게, 두근두근, 가슴 떨리고,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이 날 만큼은 스케줄을 잡지 말라고 부탁했건만, 급하게 잡힌 탓에 매니저의 간절한 부탁으로 가게 된 방송을 끝마친 참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혹시 선배가 이벤트를 해주진 않으려나 싶은 그런 설렘. 설렘은 즉 익숙하지 못하고 낯선 것의 감정이므로 조마조마함 또한 같이 동반하여 찾아왔다. 이런 감정은 첫 데이트 이후로는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딱 그때의 느낌이다. 집에 들어갔는데 너무 식상한 이벤트라던가, 그러면 어쩌지 싶다. 센스가 특출나지 않은 선배라면 충분히 그럴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만 해도 무슨 속내가 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나츠메는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도 불안했다.
  오늘 아침은 참 답지 않게 어색한 아침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매일 그래왔던 것처럼 서로의 품 속에서 눈빛을 교환했는데 그게 꼭, 처음 사랑을 깊이 나누었던 그날 밤 다음의 아침 같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나 어중간한 미소로 식탁에 앉아 어벙하게 먹은 아침밥은 참 어설펐다.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참 어리숙해 보였던 그였기 때문에, 성대하진 못해도 나름 특별한 날이 될 오늘은 어떨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침실에 장미꽃을 무진장 뿌려둔다던가, 그런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촛불로 침실까지 길을 만들어 둔다던가, 그것도 조금.


  “나츠메 군, 왔어요? 많이 피곤하죠?”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반기는 츠무기의 모습은 조금 나츠메를 뒷걸음질 치고 싶게 만들었다. 싫어서가 아니라, 저 사람 왜 저래도 아니라, 아니 그게 맞는 것 같다. 저 사람 왜 저래. 나츠메를 반긴 츠무기의 모습은 머리를 뒤로 묶어 귀공자처럼 정리하곤, 어디서 샀는지 딱 맞는 수트를 빼입고 있었다. 싫다는 게 아니라 좋긴 좋은데, 나츠메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부끄러움이 들어찼던 것이다. 맨날 사복으로 잔소리하고 싶게 만들더니, 저 수트는 왜 또 내 취향이래. 물론 후줄근한 모습이었으면 왜 이런 중요한 날에 최소한의 준비도 안 했냐며 화를 냈을 것이다만, 막상 저 멋들어진 모습을 보니 정말 오늘이 날이 날인가보다 싶었다.

  “나츠메 군? 무슨 문제 있나요?”
  “…잘생겼.”
  “네?”
  “그래서 짜증 .”
  “네에? 칭찬이에요, 그거?”

  그럼 잘생겼다는 게 칭찬이지 욕이겠어? 나츠메는 살짝 투정부리고 자신을 안으로 들이는 츠무기를 따라갔다. 속마음이 그대로 툭 튀어나올 만큼 위험했다. 아냐, 오늘만큼은 조금 솔직해져도….

  “짜잔! 오늘을 위해 준비했어요.”

  저 무드등은 또 어디서 구해온 거람? 나츠메는 기가 막히게 차려진 식탁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이번에도 싫어서가 아니라, 저 사람 왜 이러지의 느낌으로. 조명을 어두컴컴히 해놨더니, 꽤나 멋들어진 무드등으로 분위기를 내놓았다. 식탁에는 탐스러운 꽃다발 앞에 향초 여럿이 심지를 태우고 있었다. 중앙에는 저와 그 둘이 이름이 쓰인 케이크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위로 작정한 듯 만든 요리들이 보였다. 스테이크는 매번 굽기를 조절 못해서 자주 잔소리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무슨 자신감으로 티본 스테이크를 내놓았는지 모르겠다. 샐러드는 괜찮아 보이고, 파스타는….

  “그…. 이번에는 레시피에 제대로 맞추어서 요리했는걸요!”
  “그냥 부챗살 스테이크도 바싹 웰던으로 익히던 사람이 티본 스테이크…. 아니야, 뭐. 노력했. 선배는 제대로 하면 잘하니.”
  “나쁘진 않을 거예요. 물론, 좀 더 잘하는 레스토랑에 데려가도 괜찮았겠지만 오늘은 내가 하고 싶었던걸요.”
  “흐응…. 잠깐만 기다려. 내가 준비한 것도 들고 올.”  


  나츠메가 저가 준비한 것들을 꺼내오자, 츠무기는 바로 받아 식탁 위에 올려놓곤 나츠메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런 에스코트는 어디서 배웠어?
  “엣, 나 예전부터 이러지 않았나요…?”
  “그랬나, 기억이 안 나.”
  “너무하네요!”

  곧이어 츠무기는 나츠메가 마개를 따준 와인을 들어 와인잔에 조르륵 따라냈다. 한 잔, 두 잔…. 얼마나 비워질지는 모르겠다.

  “이거 향이 좋아요. 과일향이 강하네요.”
  “그게 선배 취향이잖. 나는 이해할 수 없지.”
  “후후, 고마워요. 역시 나츠메 군은 세심하네요.”
  “선배도 선배치곤, 꽤 잘 준비했.”

  츠무기도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듯 나츠메와 마주 보고 앉았고, 잔을 들었다. 잔을 빙그르 돌리며 와인의 향을 고루 맡곤 내민다.
  

  “나츠메 군, 짠― ”

 
  짠―

  잔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한 모금을 마신다. 오직 무드등과 향초로만 이루어진 조명이 비스듬히 얼굴을 밝힌다. 평소에도 색을 알기 힘들던 츠무기의 눈동자는 지금은 짙은 녹색에 가깝다. 녹색 파도가 출렁거린다. 그 눈에 비친 자신은 울렁거리며 그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

  파도는 곧 넘실거리며 넘어올 것만 같았다. 널찍하게 크기만 하던 그의 눈에는 기다란 속눈썹 외에는 방파제가 보이지 않는다. 참 주책맞은 사람이다. 험하게 대할 때도 자주 울상을 지으며 항의하곤 하던 그였지만, 어쩐지 사귀게 된 후로 더 눈물이 많아진 것 같다고.

  “행복해져요, 나와.”
  “뭐야, 또 어릴 적 이야기?
  “아뇨. 이건 내 다짐이에요.”


  내가 또 이걸 어기려 하거든, 그때보다 더 호되게 혼내주세요. 아니, 그럴 일이 없도록 할 거니까요. 나츠메 군은 지금 이대로, 웃어주세요. 너울거리는 향초의 불꽃 너머 굳은 맹세가 들린다.

  “…. 뭐야, 그 맹세.”
  “후후, 조금 낯간지럽나요. 미안해요. 꼭 그 말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선배도 그냥 이대… 아냐, 좀 발전했으면 더 좋겠는.”
  “그럴게요. 나츠메 군이 원하는 방향대로.”
  “그래. 좀 더 노력해 .”

  너무 엄하게 자신을 채찍질하진 말고. 맞아, 선배. 준비한 게 있는데. 잠깐만. 나츠메는 부드러운 질감의 융단으로 둘러싸인 상자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짙은 색감의 파란색, 다른 하나는 붉은색으로 딱 보아도 무엇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반지 같은 거. 이번에는 내가 먼저 준비해주고 싶었는데요.”
  “나중에 선배가 돈 더 많이 벌거든, 다이아몬드가 무진장 박힌 반지로 사 오던.”
  “지금도 무리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요…. 그랬다간 나츠메 군이 또 쓸데없이 돈 많이 썼다고 화낼 것 같지만요.”
  “더 벌어야. 이제 좀 연예계에서 떴다고 금전 감각도 붕 뜰 사람도 아니잖아? 
  “네에, 네. 열심히 일할게요.”


  츠무기는 곤색 상자를 들고, 나츠메는 적색 상자를 들었다. 눈빛을 나누며 동시에 연 상자에는 자그마하지만 존재감을 뚜렷이 하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곤색 상자에는 페리도트가 박힌 반지가, 적색 상자에는 자수정이 박힌 반지가. 반지의 안쪽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어라, 이거 우리 탄생석이네요?”
  “바로 알았.”
  “나 이런 의미 찾는 거 좋아하잖아요. 분명 월별 탄생석만 보고 고른 것일 텐데, 어쩐지 우리랑 잘 맞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이것이 운명일까요?”
  “나름 디자인도 엄청 신경 써서 산 거니까, 잃어버리면 죽인.”
  “나츠메 군이 선물해준 것이니, 절대 잃어버리지 않아요. 이걸 끼고 다니면 꼭…. ”
  “꼭 뭐?


  나츠메의 물음에 츠무기는 의뭉스레 넘어갔다. 츠무기는 한참동안 사랑스럽게 반지를 살펴보다가,
  

  “나츠메 군, 이거. 우리 바꿔끼면 안 될까요.”
  “왜? 사이즈도 안 맞을 . 안에 쓴 글씨….”
  “자수정을 볼 때마다 나츠메 군의 생각이 더 잘 날 것 같아서요. 사이즈는 어떻게든 맞는 손가락에 끼우면 되는 거고, 안에 쓴 글씨는…. 그것도 나츠메 군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가 더 좋아요.”

  그렇게 이유를 들으니 나츠메 자신도 페리도트의 반지를 끼고 싶어졌다. 저걸 볼 때마다 저가 좋아하는 선배의 눈동자가….

  “하지만 안.”
  “왜요?”
  “선배의 반지에는 내가 먼저 주문을 걸어 두었.”
  “무슨 주문을요?”
  “…. 안 말해. 그러니까 안. 그건 오직 선배만을 위한 주문이. 부적 같은 거라고 생각.”


  단호하게 말하는 나츠메에, 츠무기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조금 더 고집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나츠메는 자신처럼 반지를 바꿔끼고 싶은 모양새였다. 솔직하지 못해서 대놓고 말은 못 하는 거라지만,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어서 고집을 피워달라고 요구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츠무기는 반지를 들어 입맞춤을 하였다.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나츠메 군의 불행은 모두 나에게로…. 서투른 주문을 속으로 외웠다.

 
  “…뭐 하는 거야?
  “나도 주문을 걸었어요. 나츠메 군을 위한 주문을. 나츠메 군의 주문보다는 분명 효과가 없겠지만…. 오직 나츠메 군만을 위한 거니까, 어쩔 수 없어요. 이건 이제 나츠메 군이 껴야 해요.”

  나츠메는 입을 떡 벌리고 츠무기를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어퍼컷에, 자신도 어쩔 줄을 모르다가,
  츠무기가 했던 것처럼 반지에 입을 맞추고 주문을 외웠다. 저 사람이 사랑받게 해주세요, 더 이상 불행이 잠식하지 않도록…. 어쩌면 이 주문은 저번에 걸었던 것보다 더 강력하게 걸려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문이 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주문을 교환했다.


  “무슨 주문을 걸었어요?”
  “선배가 먼저 말하.”
  “나츠메 군이 먼저 말하면요.”
  “그럼 안 말해.”
  “우리 이렇게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거 아니죠?”

  그러게 말이야. 걱정이네. 나츠메는 장난스럽게 츠무기의 볼을 잡아당기고서 곧바로 입을 맞추었다. 그에 응답하는 츠무기는 나츠메의 한쪽만 기다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휘감으며 목덜미를 끌어안고 더욱 깊이. 아직 케이크는 한 조각도 잘리지 못했고, 와인은 단 한 모금만, 향초의 심지는 점점 향초 속으로 파고들며 두 사람을 위해 밝기를 낮추어갔다. 또 한 번의 시작이었다.